계리직공무원 한국사 필기 기출문제복원 (2008-08-31)

계리직공무원 한국사
(2008-08-31 기출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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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밑줄 친 A, B, C층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 A층보다는 B층이, B층보다는 C층이 지표면에 가깝다.
  2. A층과 같은 시기의 유적은 주로 내륙의 산지에 분포하고 있다.
  3. B층의 유적을 남긴 사람들은 농경 정착 생활을 하며 취락을 이루었다.
  4. C층과 같은 시기의 유적에서는 세형동검과 잔무늬거울이 출토되었다.
(정답률: 79%)
  • 정답은 "B층의 유적을 남긴 사람들은 농경 정착 생활을 하며 취락을 이루었다."이다. 이유는 B층은 신라시대의 유적으로, 농경 정착 생활을 하며 취락을 이룬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주로 해안가에 위치한 도시성 유적이 많았다는 것이다. A층과 같은 시기의 유적이 내륙의 산지에 분포하는 이유는, 당시에는 산지에도 농경이 이루어졌고, 내륙 지역이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방어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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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다음 민정문서의 내용을 통해 추론한 통일신라 사회의 모습으로 잘못 된 것은?

  1. 노동력이 국가의 주요 수취 대상이었다.
  2. 자연 촌락의 기반 위에 행정촌을 편제하였다.
  3. 나무와 가축도 국가 수취 대상으로 파악되었다.
  4.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에 의해 직접 지배를 받고 있었다.
(정답률: 77%)
  • 다음 민정문서에서는 통일신라 시기의 사회 모습을 다루고 있으며, 이 시기에는 자연 촌락 위에 행정촌을 편제하여 지방 행정을 실시하였고, 노동력과 자원 등이 국가의 수취 대상으로 파악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따라서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에 의해 직접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잘못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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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발해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1.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고려국왕임을 자처하였다.
  2. 문왕 때에는 당나라와 친선관계를 맺으면서 정치체제를 정비하였다.
  3. 무왕 때에는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지역으로 진출하여 해동성국이라 불리었다.
  4. 발해 유적지에서는 온돌 장치나 돌방무덤 등이 발굴되었다.
(정답률: 78%)
  • 무왕 때에는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시키고 요동지역으로 진출하여 해동성국이라 불리었다는 사실이 옳지 않습니다. 발해는 말갈족과 함께 살았지만, 말갈족을 복속시키거나 요동지역으로 진출한 것은 아닙니다. 이는 발해와 관련된 역사적 사실 중에서도 흔히 오해되는 부분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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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고려시대 역사서의 편찬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1. 『삼국사기』는 유교적 합리주의 사관에 기초하여 기전체로 서술되었다.
  2. 『제왕운기』는 고려 초의 구삼국사를 기본으로 하여 중국 중심 사상을 극복하였다.
  3. 『삼국유사』는 우리의 고유 문화와 전통을 중시하였고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다루었다.
  4. <동명왕편>은 동명왕의 업적을 칭송한 일종의 영웅 서사시로 고구려의 전통을 중시하였다.
(정답률: 67%)
  • "『제왕운기』는 고려 초의 구삼국사를 기본으로 하여 중국 중심 사상을 극복하였다."가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이유는 『제왕운기』는 오히려 중국 중심 사상을 강조하며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존중하고 따라하는 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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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백두산정계비와 관련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 청나라 사람의 계속되는 국경 침범 문제를 종식시키기 위해 조선 측에서 청나라에 요청하여 국경을 심사하였다.
  2. 숙종 때 조선과 청 두 나라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확정한 뒤 세웠다.
  3. 청나라는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된 동쪽 경계인 토문강을 두만강이라고 주장하였다.
  4.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된 토문강을 송화강 지류로 해석하면 북간도 지역은 조선의 영토가 된다.
(정답률: 50%)
  • "청나라 사람의 계속되는 국경 침범 문제를 종식시키기 위해 조선 측에서 청나라에 요청하여 국경을 심사하였다."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실제로는 청나라 측에서 백두산 일대의 국경을 두만강으로 주장하였고, 조선 측에서는 이를 인정하지 않아 백두산정계비를 세우고 국경을 확정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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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밑줄 친 ‘이 도서’로 옳은 것은?

  1. 선원보략
  2. 승정원일기
  3. 조선왕조실록
  4. 조선왕조 의궤
(정답률: 76%)
  • 이미지를 보면 "조선왕조 의궤"에 밑줄이 그어져 있으므로 정답은 "조선왕조 의궤"입니다. "조선왕조 의궤"는 조선시대의 역사서로, 조선왕조의 역사와 문화, 정치, 경제 등에 대한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다른 보기들인 "선원보략",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실록"도 모두 조선시대의 역사와 관련된 기록서이지만, "조선왕조 의궤"만큼 종합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는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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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조선전기 농업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1. 견종법이 널리 보급되어 노동력을 절감하는 효과가 나타났다.
  2. 시비법이 발달하여 경작지를 묵히지 않고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3. 남부지방에 모내기법이 보급되어 생산량을 증가시킬 수 있었다.
  4. 여러 지역 농민들의 실제 경험을 수집하여 정리한 『농사직설』이 편찬되었다.
(정답률: 62%)
  • "견종법이 널리 보급되어 노동력을 절감하는 효과가 나타났다."는 조선전기 농업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한 것이다. 견종법은 소나 말 등의 가축을 이용하여 농경지를 경작하는 방법으로, 인력을 대체하여 생산성을 높이는 효과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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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중인과 서얼 층의 성장과 더불어 이른바 위항인(委巷人)들의 문학 활동이 활발해진다. 다음 중 위항인들의 작품이 아닌 것은?

  1. 규사(葵史)
  2. 대동야승(大東野乘)
  3. 연조귀감(?曹龜鑑)
  4. 호산외기(壺山外記)
(정답률: 47%)
  • 정답은 "대동야승(大東野乘)"이다. 이 책은 중국의 소설인 "홍루몽(紅樓夢)"을 번역한 것으로, 위항인들의 작품이 아니라 중국의 소설이다. 나머지 세 작품은 모두 위항인들이 쓴 작품으로, 규사는 김시습의 대표작 중 하나인 역사 소설이고, 연조귀감은 이황의 시조집이며, 호산외기는 이이의 여행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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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조선시대의 과거제도에 대한 설명 중 옳지 않은 것은?

  1. 문과 식년시는 초시와 복시, 왕 앞에서 실시하는 전시 등의 세 단계로 치러졌다.
  2. 무과도 문과와 같은 절차를 거쳐 치르는데 최종 선발 인원은 33명이었다.
  3. 소과 합격자는 성균관에 입학하거나 문과에 응시할 수 있었으며, 하급 관리가 되기도 하였다.
  4. 기술관을 뽑는 잡과는 3년마다 치렀으며 분야별로 규정된 인원이 있었다.
(정답률: 67%)
  • 무과도 문과와 같은 절차를 거쳐 치르는데 최종 선발 인원은 33명이었다는 설명이 옳지 않습니다. 조선시대의 과거제도에서는 무과와 문과는 각각 다른 시험을 치르고, 선발 인원도 다르게 결정되었습니다. 무과는 대개 1명 또는 2명, 문과는 3명에서 5명 정도가 선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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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고려시대 여진족을 정벌하기 위해 편성된 부대가 아닌 것은?

  1. 신기군(神騎軍)
  2. 신보군(神步軍)
  3. 신의군(神義軍)
  4. 항마군(降魔軍)
(정답률: 68%)
  • 신의군은 고려시대 여진족을 정벌하기 위해 편성된 부대가 아니라, 고려 제23대 성종 때 신앙심이 깊은 군사들을 모아 만든 군대로, 주로 신앙심이 깊은 군사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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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다음 우표에서 기념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1. 국제 여론에 호소하여 국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2. 황국협회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 출국하였다.
  3.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회의에 참석하지 못하였다.
  4.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정답률: 72%)
  • 우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20주년을 기념하는 것이므로, 보기 중 "황국협회의 재정적 지원을 받고 출국하였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과는 관련이 없는 설명이다. 따라서 이 보기가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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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다음은 고려와 조선시대 화폐의 사용과 관련된 것이다. 시대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1. ㄱ-ㄷ-ㄴ-ㄹ
  2. ㄴ-ㄱ-ㄹ-ㄷ
  3. ㄷ-ㄹ-ㄱ-ㄴ
  4. ㄹ-ㄷ-ㄴ-ㄱ
(정답률: 61%)
  • 고려시대에는 천문도(天文圖)와 함께 사용되는 천문판화(天文版畵)가 화폐로 사용되었고, 조선시대에는 동화(銅貨)와 은화(銀貨)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ㄱ-ㄷ-ㄴ-ㄹ"이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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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고려 사회에 대한 설명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1. 여성의 재가는 별 문제 없이 행하여졌다.
  2. 사위와 외손자에게까지 음서의 혜택이 있었다.
  3. 출생 순서대로 호적에 기재하여 남녀의 차별을 하지 않았다.
  4. 고려 초 왕실에서 성행하였던 친족 간의 혼인 풍습은 중기 이후에 사라졌다.
(정답률: 70%)
  • 고려 초 왕실에서 성행하였던 친족 간의 혼인 풍습은 중기 이후에 사라졌다는 설명이 적절하지 않은 이유는 해당 내용이 사실과 다르기 때문이다. 고려 시대에는 왕실 내부에서 친족 간의 혼인이 일어나는 것이 일상적이었으며, 이는 중기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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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다음 각 실학자들의 주장 내용이 잘못 연결된 것은?

  1. 박지원 :<양반전>을 저술하여 양반 중심 문벌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하였다.
  2. 유득공 :『금석과안록』을 지어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혔다.
  3. 유형원 :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제도의 개혁안으로 균전론을 주장하였다.
  4. 정약용 : 실학을 집대성하였으며 토지제도 개혁론으로 여전론과 정전제 등을 주장하였다.
(정답률: 74%)
  • 정답은 "유형원 :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제도의 개혁안으로 균전론을 주장하였다." 이다. 유형원은 균등한 토지분배를 주장하는 균등론을 주장하였으며, 균전론은 유득공이 주장한 것이다. 유득공은 '금석과안록'에서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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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다음 회고를 남긴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 화북지역에서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였다.
  2. 조선의용대를 결성하여 대일 전선에 참가하였다.
  3. 조선혁명군을 이끌고 영릉가 전투에 참가하였다.
  4. 개정임시헌법에 따라 임시정부 주석으로 취임하였다.
(정답률: 58%)
  • 이 인물은 개정임시헌법에 따라 임시정부 주석으로 취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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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다음 선언과 관련된 단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 어린이날을 제정하고『어린이』잡지를 발간하였다.
  2. 조선공산당을 중심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3. 백정의 평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형평운동을 일으켰다.
  4.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구하며 기회주의를 배격하였다.
(정답률: 64%)
  • 이 선언은 1926년 3.1 만세운동 이후에 일어난 '백성운동'의 일환으로, 백성들의 권리와 자유를 요구하는 운동이었습니다. 이 선언은 백성들이 평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주장하며, 이를 위해 형평운동을 일으켰습니다. 따라서 "백정의 평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형평운동을 일으켰다."가 옳은 설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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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1949년에 제정된 농지개혁법과 관련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1. 제정 즉시 시행되지 못하고 이듬해인 1950년에 시행되었다.
  2. 유상매입, 유상분배의 원칙을 적용하여 농지를 재분배하였다.
  3. 토지 소유의 상한선이 규정되지 않아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4. 경작지만을 대상으로 한 점에서 1946년 시행된 북한의 토지개혁과 차이가 있었다.
(정답률: 54%)
  • "토지 소유의 상한선이 규정되지 않아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라는 설명은 옳은 설명입니다. 이는 농지개혁법이 제정될 당시에는 토지 소유의 상한선이 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대규모 지주들이 여전히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농지재분배의 실효성이 떨어졌기 때문입니다. 이후 1950년에 상한선이 규정되어 이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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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다음 자료와 관련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 최초로 남북한 정상이 만나 합의한 공동 선언문이다.
  2.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등 화해 분위기가 배경이 되었다.
  3. 남북조절위원회를 구성하고 직통 전화를 가설하기로 하였다.
  4. 경의선 철도 복원 사업을 결정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답률: 37%)
  • 이미지에서 보이는 것은 2000년 6월 15일 남북한 정상이 만나 공동 선언문을 발표한 것이다. 이 공동 선언문은 남북한 간의 화해 분위기가 배경이 되어 이루어졌다. 따라서 정답은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등 화해 분위기가 배경이 되었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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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다음 중 한자어의 한자 표기가 올바른 것은?

  1. 납부금(納付金)
  2. 강의(講議)
  3. 대기명령(待期命令)
  4. 사법부(司法部)
(정답률: 26%)
  • 정답: 납부금(納付金)

    설명:
    - 강의(講議): 강의(講義)가 맞는 표기이다.
    - 대기명령(待期命令): 대기명령(待機命令)이 맞는 표기이다.
    - 사법부(司法部): 사법부(司法府)가 맞는 표기이다.

    따라서, 올바른 한자어의 한자 표기는 "납부금(納付金)"이다. "납부"는 돈을 내다는 뜻의 동사이며, "금"은 돈을 뜻하는 명사이다. 따라서, "납부금"은 돈을 내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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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다음은 중국 춘추 시대 말기의 법치주의자인 한비자에 관한 내용이다. ( )에 들어갈 故事成語로 알맞은 것은?

  1. 杞國憂天
  2. 牽强附會
  3. 囊中之錐
  4. 守株待兎
(정답률: 40%)
  • 한비자는 "守株待兎"라는 成語를 사용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했다. 이 成語는 나무에 기둥을 세우고 그 기둥 주변에서 토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을 뜻한다. 한비자는 이 成語를 사용하여 사람들이 자신이 가진 것에만 집착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않는 것을 비판했다. 그는 이러한 태도가 발전과 혁신을 막는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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